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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정전협정의 ‘오해와 진실’

‘인민군 징집’ 국민 구하려 반공포로 전격 석방

 

 정전협정 과정은 험난했다. 시작 당시 많은 이들이 쉽게 총성이 멎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무려 2년여의 시간이 소요됐다. 사연도 많았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잘못된 정보와 악의적 왜곡으로 뒤틀린 사실이 정사로 오해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협정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며 외면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무게를 지운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던 정전협정. 이에 대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1953년 7월 27일 문산에서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클라크 사령관은 판문점 조인식에 참여하지 않고 유엔 회담 대표 숙소가 있던 문산에서 따로 서명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아시아·아랍 13개국, 유엔에 정전안 제시

6·25전쟁에 대한 국제기구 차원의 종식 노력은 ‘정전협상’ 이전에도 있었다. 1951년 6월 23일 소련의 첫 제안 이전, 이미 아시아 및 아랍 13개국은 유엔에 정전안을 제시했다. 1950년 12월 12일에 이란·인도·캐나다 3국을 주축으로 하는 정전3인위원회의 설치가 논의됐고 이는 12월 14일 유엔총회의 결의 제384호로 통과됐다.

이때 유엔총회 의장인 이란 대표, 인도 수석대표, 캐나다 외무장관이 정전에 관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지명됐다. 이들은 1951년 1월에 유엔총회에 정전 5개 항을 제시했다. 하지만 중국과 소련이 이에 반대로 휴전 협상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1951년 소련 라디오 방송 정전협상 계기

소련의 휴전회담 제안은 1951년 6월 23일 유엔 대표 말리크의 라디오를 통한 방송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면에는 미국의 끈질긴 설득이 있었다. 1951년 5월 미국은 프랑스, 독일, 홍콩, 모스크바 등에서 외교·민간 채널을 통해 소련과 중국 관료들에게 적극적 휴전 의지를 전달했다. 5월 31일에는 전 소련 대사였던 조지 케넌이 비밀리에 말리크와 만나 미국의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1950년 7월 초순 이미 미 트루먼 대통령은 주 소련대사를 통해 소련에 전문을 보낸다. 소련으로 하여금 북한의 침략 행위를 중단시키고 군대를 철수하도록 설득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소련은 이를 거부한다.

하지만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전세가 역전되자 소련은 유엔에 급히 휴전을 제의하기도 했다. 소련 유엔 대표 말리크는 1950년 10월 1일 유엔군이 38선을 넘자마자 그 다음 날 바로 즉각 휴전과 외국군 철수를 주장하며 결의안을 유엔총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당시 통일에 의한 전쟁 종결을 추구했던 유엔군 측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리하자면 1951년 6월 23일 소련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내보낸 휴전 협상 제의는 유엔국과 공산군 양 진영이 물리적으로 회담장에 나오게 한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하지만 전쟁 초기부터 전쟁 중지를 위해 꾸준히 활동한 유엔과 미국의 노력 연장 선상에서 시작됐다.  

 

한국도 정전협정에 참석

정전협정 당시 한국 측은 서명하지 않았다. 이에 많은 사람이 한국은 정전협정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 측은 1951년 7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정전회담에 줄곧 참여했다. 최초 백선엽 장군이 대표로 참석한 이래 최덕신 장군에 이르기까지 5명의 대표가 회담장을 지켰다. 다만 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 한국 측의 실제 발언권이 약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처지는 북한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공산군 측은 당시 북한군의 남일을 수석대표로 내세우며 북한에 실질적 의사 결정권이 있는 것처럼 위장했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이미 공개된 소련과 중국의 비밀자료를 보면 회담의 사안 하나하나를 스탈린이 지시하고 모택동이 실행한 증거가 수두룩하다.

 

 

韓, 정전협정 서명 안한 이유 ‘북진 통일’

당시 한국 측이 휴전회담의 마지막에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것은 당시 한국의 국가 목표가 통일이었기 때문이다. 분단된 한반도를 하나로 통일하고 북한의 불법 기습남침을 응징할 기회를 갖기 위해서는 정전협정에 서명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승만 정부는 소련과 중국이라는 초유의 공산 강대국이 북한의 뒤에 여전히 버티고 있는 이상 정전협정에 순순히 서명하는 것만으로는 향후 국가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유엔군 사령부가 1953년 5월 25일 공산군 측에 대한 양보로 송환 거부 반공포로들에 대한 즉각 석방을 시행하지 않자 크게 반발하고 5월 27일 미국에 휴전 협상 불참을 공식 통보했다.
 

한국은 왜 반공포로를 석방했나?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은 당시 전 세계를 발칵 뒤집었다. 정전협정 세부 사안에 대한 이견, 특히 포로교환 문제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실력행사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유엔군 포로에 ‘대한민국 국민’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6·25전쟁 중 북한군은 대한민국 국민을 징집하고 전투 중 포로로 잡힌 국군 장병들을 강제로 북한군으로 편입해 사지로 내몰았다. 1951년 12월 당시 유엔군이 억류하고 있던 포로 중 이러한 대한민국 국민이 무려 3만5000명을 넘었다. 그런데 공산군은 ‘강제 송환 원칙’을 운운하며 이러한 반공포로를 공산 측으로 강제송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포로 처리 문제를 두고 양측이 격론을 벌인 핵심 의제 중 하나였다.

1953년 5월이 돼서야 유엔은 공산 측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 3만5000명을 휴전과 동시에 즉시 석방한다는 조항을 협정문에서 삭제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53년 6월 18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 측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이른바 ‘반공 포로’의 석방을 단행했다. 이때 상무대, 논산, 마산, 부산의 4개 포로수용소에 있던 3만5698명의 포로 중 2만7388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공동성명 발표

반공포로 석방은 유엔군 특히 미국 측에 큰 충격을 주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1953년 6월 25일 월터 로버트슨 국무차관보가 대통령의 특사로 한국을 방문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후 한미 간의 본격적인 협상이 이뤄지고 1953년 7월 12일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을 것이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 측은 ‘휴전이 되고 나면 긍정적으로 논의해 보자’는 태도였다. 7월 14일에는 워싱턴에 미국, 영국, 프랑스 3개국이 모여 3국 외무장관 회의를 하고 중공이 향후 재침략을 한다면 이를 위에 공동조치할 것이라는 성명이 발표되기도 한다. 정전협정 체제 이후 공산국 측이 다시는 쉽사리 남침 적화야욕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못을 박은 셈이다.


※ 자료 도움 = 군사편찬연구소 워싱턴 NARA 파견 연구원 남보람 소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