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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6·25 65주년 특집] 또 다른 6·25 10대 전투·작전 <4>한강방어선 전투

“상관의 철수 명령이 떨어질때까지 싸운다” 맥아더 장군 감동

 

■ 한강방어선 전투

“상관의 철수 명령이 떨어질때까지 싸운다” 맥아더 장군 감동

 6ㆍ25전쟁 한강방어선 전투


 

 

한강 방어전투 그림.


 

 

 

    한강방어선 전투는 개전 초기 서울이 함락된 직후 국군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예하의 3개 혼성사단(수도, 제2, 제7사단)이 한강 남안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북한군 제1군단 예하의 보병 3개 사단(제3, 제4, 제6사단)과 전차 1개 여단의 공격을 6일에 걸쳐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은 미아리방어선을 돌파한 후 서울 중심부로 돌입했고 국군은 전방으로부터 철수하는 병력을 집결시켜 한강방어선을 구축했다.
 
 한강 방어선 구축에 나선 국군은 적들의 도하를 지연하고자 광진교, 한강교 등을 작전상 폭파했으나 경부선철교는 전파되지 않고 그 일부만 손실되게 되는데 바로 이곳이 며칠 후 북한군의 도하 포인트가 된다.
 
 오전 11시 30분경 창경궁 앞, 청량리 등지에서 시가전을 펼친 끝에 북한군은 서울의 중심부에 이르게 되어, 전쟁발발 4일째에 수도 서울은 북한군에 함락되고 김일성은 서울 함락 축하 연설까지 하게 된다. 이 때 한반도의 전선은 부천-한강남쪽-홍천-대관령을 연결하는 띠로 형성된다.
 
 1950년 6월 29일 여의도 앞 밤섬을 장악한 북한군은 이날부터 본격적으로 한강 도하를 위한 탐색전을 시작했으며 국군은 탐색 중인 적군과 접전을 펼쳐 격퇴시키는 전과를 이루기도 한다.
 
 그리고 이 날 일본에 머물던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는 한국의 전황을 직접 살펴보고 지상군 파병의 필요성을 검토하기 위해 영등포로 날아와 방어선을 시찰하고, 병사들을 격려한다.
 
 이때 맥아더는 개인호에서 진지를 지키고 있던 병사에게 “언제까지 그 호를 지키고 있을 것인가?”라고 물었고, 병사는 “군인은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저의 상관이 철수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죽는 순간까지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라고 답변하였다.
 
 이를 들은 맥아더는 “내가 도쿄로 돌아가는 즉시 지원 병력을 보내줄 터이니 그때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싸우라!”고 병사를 격려하였다. 같은 날 국군은 적의 도하를 막기 위해 한강철교의 폭파를 시도하고, 경기도 소사에 주둔해 있던 국군의 김포공항 탈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비보가 날아든다.
 
 1950년 6월 30일 한강 방어선이 구축된 지 3일째 되는 6월 30일에 북한군은 신사리~말죽거리 방면으로 본격적인 도하를 개시 한다.
 
 한편 전날 영등포 전선을 시찰하고 돌아간 맥아더 사령관의 보고와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에 의해 미군은 지상군 투입을 최종 결정하게 된다. 지상군의 투입 결정과 함께 미 공군은 경인선 한강철교를 폭격하여 상행선 절단에 성공한다. 신사리 전선에서 한강 하류 쪽 약 12킬로 지점 여의도 비행장에서는 양측의 공방 끝에 국군이 철수하게 된다.
 
 1950년 7월 1일 북한군은 4사단을 앞세워 여의도~영등포 전선으로의 도하를 본격적으로 감행한다. 이 날에는 노량진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북한군은 몰래 경부선 철교 보수작업에 착수하기도 한다. 국군은 적의 남하 지연에 혼신을 다한다.
 
 1950년 7월 2일 국군은 영등포 진지와 노량진역 부근의 강변진지에서 적과 공방전을 지속한다. 보병학교 연대는 북한의 보급품 수송대를 섬멸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으며, 미 24사단 주력부대가 부산에 상륙한 것은 한강 방어선을 구축한지 5일째 되는 이 날이다.
 
 1950년 7월 3일 새벽 4시 경부선 철교로 북한군 전차가 노량진 및 영등포에 진입하면서 한강방어선은 무너진다. 공간은 내어주되 시간을 버는 작전으로 진행되어 미 지상군의 투입이 시작 될 때까지 북한군 주력부대의 발목을 붙잡기 위한 혼신의 작전으로 구축된 국군의 방어선은 6일을 버티고 그 의무를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