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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참전용사 희망드림코리아] ⑧ 콜롬비아 참전영웅 에르난 가르시아 온띠본 씨

 

 

처참한 폐허 속 13세 소년 우연히 만나 이름 지어주고 아들처럼 정성다해 돌봐

40여 년 만에 콜롬비아에서 뜨거운 재회

하지만 빼빼 갑작스런 사망에 안타까워 마지막 소원은 한국가족 만나보는 것

 

“6ㆍ25전투 현장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으로 40여 년 만에 만났지만 감동은 잠시뿐이었어요. 그동안 가슴 속에 쌓아둔 이야기를 풀어 내지도 못했는데 영원히 이별을 했기 때문이죠.”

 한국인과의 짧고 강렬한 만남, 그리고 긴 이별의 주인공은 6ㆍ25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콜롬비아 참전영웅 에르난 가르시아 온띠본(86) 씨.

온띠본씨는 한국전쟁에 대한 특별한 추억이 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치열한 전장에서 코흘리개 한국 어린이와의 극적인 만남, 그리고 아쉬운 이별이 그것.

 

40여 년 만에 온띠본(오른쪽) 씨와 인서영 씨가 콜롬비아에서 다시 만난 모습. (1994년)

 

 전후 60여 년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지구촌 최빈국 대한민국은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온띠본 씨 인생은 반전이 없었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힘들다. 그는 열심히 살았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6ㆍ25전쟁 이후 단 한 번도 한국 땅을 밟아 보지 못한 참전영웅 중 한 사람이다.

 콜롬비아는 한국전쟁 당시 중남미에서 전투부대를 파병한 유일한 혈맹이다. 콜롬비아군(지상군 1개 대대, 함정 1척)은 1951년 4월 22일 한국전에 투입돼 금성지구전투, 김화 400고지전투, 연천 180고지전투 등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우고 1955년 10월 11일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 기간 4314명이 참전해 200명이 전사하는 등 총 61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952년 4월 부산항에 도착한 스물셋, 그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은 처참했다. 모든 건물이 파괴돼 가난과 질병이 창궐했고, 길거리에는 전쟁고아로 들끓었다.

 자동차 정비업소에 근무했던 그는 콜롬비아 대대 수송부대로 배치됐다. 트럭이나 지프차 수리는 물론 병력과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당시 13살 한국 소년을 만났다.

 “한국전쟁에 투입된 지 한 달이 지날 무렵, 서울서 임무를 수행하고 본대로 복귀하던 중 구걸하는 한국 어린이들을 만났어요. 모든 아이들이 먹을 것을 요구했는데 그때 인서영은 절실한 눈빛으로 나에게 손을 내밀며 차에 태워달라고 했죠. 선탑자 허락을 얻어 승차시키면서 한국 소년과 인연이 시작됐죠.”

 

콜롬비아의 한국전쟁 참전영웅 온띠본(왼쪽) 씨와 6·25전쟁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전우’이자 아들이었던 인서영 씨.(1953년)

 

 그날 이후 손짓 발짓으로 소통하며 서영이에게 ‘빼빼’라는 스페인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는 알베르토 루이즈 노보아 대령에게 서영이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콜롬비아 수송부대에서 함께 지냈다.

 “아이에게 ‘빼빼’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은 그의 한국 이름을 아무도 발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물론 당시 콜롬비아 병사들 가운데 ‘빼빼’가 한국어로 ‘마르다’는 의미인줄 아무도 몰랐죠. 서영이가 굶주려 빼빼 말랐던 것은 우연이었죠.”

 그는 막사에서 서영이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치며 극진히 돌봤다. 금방 콜롬비아 병사들 이름을 줄줄 외웠고, 각종 무기 이름도 스페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서영이는 우리의 아들이었고, 콜롬비아 대대원으로서 야전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전우’였다. 서영이는 옷이 낡고 헤져 콜롬비아 군복을 입고, 군화까지 신고 있어 멀리서 보면 키가 작은 콜롬비아 군인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1954년 6월 2년간 파병 임무를 마치고 콜롬비아로 귀환했다. 그때 서영이에게 미화 100달러와 종이 비행기를 선물했고, 하느님께 건강하게 자라달라고 기도했었다.

 “서영이가 있어 전선 생활이 즐거웠고,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견뎌낼 수 있었죠. 짧은 기간 많은 것을 나눈 서영이는 영원한 나의 아들이었죠. 그로 인해 한국전쟁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추억이 됐죠.”

 그후 ‘아들 빼빼’와의 만남은 40여 년(1994년) 만에 전격 이뤄졌다. 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배운 인서영 씨는 어른이 돼 육군에 입대했고, 파나마 한국무관으로 근무할 때 콜롬비아 한국 대사관을 통해 수소문 끝에 그를 만난 것.

 “빼빼(서영)는 나에게 한국을 방문해 자신의 가족을 만나자고 권유했고 나의 궁핍한 삶을 돕겠다고 여러번 약속했는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죠. 서영이는 콜롬비아 방송과 인터뷰에서 ‘온띠본 씨는 나에게 아버지와 큰형님 같은 존재다. 그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다’고 말했어요.”

 그는 1995년 3월 23일 인서영 씨를 마지막으로 봤다. 벌써 인서영 씨가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이 흘렀다. 아직도 그는 대한민국을 그리워한다. 불행하게도 가난 때문에 일부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국가보훈처 재방한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여든여섯 한국전쟁 영웅의 마지막 소원은 자신이 목숨을 담보로 지킨 한국을 방문해 인서영 씨 가족을 만나는 것이다. 올해 호국보훈의 달을 앞두고 온띠본 씨의 꿈이 실현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