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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한 뼘의 땅이라도 더! ···목숨 건 사투

정전의 역설, 협상 선점을 위한 '고지전'

피의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백마고지 전투, 저격능선전투

 

 협상의 역설이었다. 휴전을 위한 협상이었다. 하지만 전장 상황은 오히려 반대로 진행됐다. 쌍방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시작됐지만 오히려 더 많은 인명사상으로 이어졌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첫 정전회담을 한 뒤 2년여 지속된 협상 기간에 포성은 더욱 거세졌다. 한국군과 공산군은 협상 전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중 최전선의 고지는 유리한 휴전 협상을 위해 양보할 수 없는 요충지였다. 수많은 장병이 고지를 쟁탈하기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내던졌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작은 봉우리들. 우리 땅을 확보하기 위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된 ‘고지전’이었다.

 

백마고지 전투 중 국군9사단 장병들이 적진을 향해 돌격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 2만여 명 사상 ‘피의 능선 전투’

 피의 능선 전투는 미 제2사단과 국군 제5사단 36연대가 강원 양구군 동면 월운리 731·983·940·773고지 일대를 1951년 8월 18일부터 9월 5일까지 공격해 북한군 12사단과 27사단을 격퇴한 전투다.

 18일간 진행된 이 전투는 그 고지 일대를 ‘피의 능선’이라 일컫게 될 만큼 격렬했다. 아군 326명이 전사하고 2032명이 부상했다. 실종자도 414명이나 됐다.

 북한군의 피해는 훨씬 컸다. 무려 1만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이 고지 쟁탈전에서만 2만여 명의 인원이 죽거나 다치는 대혈전이 벌어진 셈이다. ‘피의 능선(Bloody Ridge Line)’이란 명칭은 종군기자들이 붙여줬다. 기사에 참혹했던 전장을 ‘피로 얼국진 능선’이란 뜻으로 소개해 현재까지 그 이름이 이어지고 있다.

 포탄 사용도 어마어마했다. 미2사단 포병단은 하루 평균 105㎜와 155㎜ 포탄 3만여 발을 쏟아부었다. 전투 기간 중 발사된 포탄이 모두 41만여 발이었다. 2.5톤 트럭으로 적재할 경우 무려 5000대 분량이다.

이처럼 북한군에 비해 월등한 포병화력은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한 적의 장애물을 무력화해 아군 기동을 원활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 유엔군의 산악전투 능력 과시한 ‘단장의 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는 피의 능선에서 11㎞ 북방에 있는 931고지 일대를 확보하기 위해 격전을 벌였던 전투다. 931고지 일대는 남에서 북으로 894~931~851고지가 연결되는 험준한 종격실 능선으로 전략적 가치가 높았다.

 피의 능선에 무혈입성한 미2사단은 단장의 능선 주봉인 931고지 일대를 탈환하기 위해 중공군 68군 204사단 및 북한군 6·12·13사단과 1951년 9월 12일부터 10월 15일까지 약 한 달간 두 차례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처음 미2사단은 이 일대를 북한군의 전초기지로 판단하고 손쉬운 탈환을 예상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북한군은 주진지로 편성하고 완강히 저항, 결국 한 달간의 공방전으로 이어졌다. 비록 미2사단이 막강한 화력과 끈질긴 공격으로 능선을 확보했지만 피해도 적지 않았다. 미2사단 병력 597명이 전사하고 84명이 실종됐다. 부상자도 3000여 명에 이르렀다.

 ‘단장의 능선’이란 이름은 종군기자 스탠 카터가 붙였다. 그는 취재 중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는 부상병의 고통에 찬 비명을 듣고 ‘단장의 능선(Heart Break Ridgeline)’이란 이름을 붙여 보도함으로써 이후 931고지 일대를 이 이름으로 부르게 됐다.

 한편 이 전투 결과 공산군이 산악지역의 재래식 전투에서도 막강한 화력을 지닌 유엔군을 당해낼 수 없다고 인지한 계기가 됐다.

  ● 열흘간 주인만 7번 바뀐 ‘백마고지 전투’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 사상 가장 치열했던 고지 쟁탈전으로 알려지고 있다. 

 강원 철원 북방의 395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9사단이 중공군 38군의 맹렬한 공격에도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약 열흘 동안이나 이를 막아내며 사수한 전투다. 395고지는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 중 하나인 철원의 서남쪽 요충지다. 만약 적군이 이곳을 점령하면 철원평야가 적의 영향권에 들어서게 된다. 

 중부지역에 배치된 아군의 병참선인 3번 도로를 비롯한 많은 보급로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아군과 적군이 이곳 을 놓칠 수 없었던 이유다. 이 전투 동안 피아간 12번의 공방전이 벌어졌고 고지 주인은 무려 7번이나 바뀌었다. 
  이 전투에서 국군9사단은 수천 명의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중공군 3개 사단의 파상적 공격을 물리쳤다. 중공군 사상자는 1만 명에 다다랐다.

 ‘백마고지’라는 명칭은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인 1952년 10월 11일 처음으로 등장했다. 포격으로 산의 형태가 백마가 누운 형상으로 보여 이름을 붙였다는 설과 외신기자들이 수많은 조명탄이 투하된 후 조명탄에 달려 있던 하얀 낙하산으로 뒤덮인 산의 형세를 보고 명명했다는 설이 있다.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는 우리군에 대한 유엔군의 인식을 새롭게 해 1952년 5월부터 미군이 주도하던 국군 증강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계기도 됐다. 

 최근 군사편찬연구소가 확보한 미 육군 군사파견대의 기록에 의하면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은 한국9사단 장병들의 정신력에 깊은 인상을 받아 이 전투를 전 세계 미군 교육 사례로 활용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 휴전 협상 압박 위해 계획적 공격 ‘저격능선 전투’

 저격능선 전투는 국군2사단이 중공군 45사단에 맞서 1952년 10월 14일부터 약 6주간에 걸쳐 42회의 백병전을 거듭한 처절한 전투다. 저격능선은 김화 동북방의 오성산부터 철원 남쪽까지 이어진 능선에 위치한 580고지의 돌출 능선이다. 오성산 확보에 필수적 접근로상의 요충지다. 

 중공군이 “모든 것을 다 줘도 오성산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했을 만큼 중요한 지역에 자리했다. 휴전 회담이 개최된 지 15개월이 흘렀던 당시 유엔군은 협상을 위해 해·공군 위주의 작전만 시행 중이었다. 

 그러던 중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은 휴전 협상 압력을 위해 제한된 공격작전을 계획했고 오성산 부근 중공군 전초 중 2개 목표를 선정하고 국군과 유엔군이 각 전초를 담당했다. 국군2사단의 목표가 바로 저격능선이었다.

 6주 동안 진행된 치열한 공방 끝에 국군2사단은 저격능선 일대 80%에 해당하는 A고지와 돌바위 고지를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국군2사단은 458명의 전사자와 1704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중공군 7600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한편 ‘저격능선’이란 명칭은 1951년 10월 이 능선을 확보한 미군이 중공군 저격병에 의해 피해를 입자 ‘스나이퍼 리지(Sniper Ridge)’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됐다. 

참조=육군군사연구소 ‘1129일간의 전쟁 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