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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종군기자들이 말하는 정전협정 순간들

 

그 넓은 조인식장에 한국인 기자석은 둘뿐이었다

 

유엔군 공산군 측 수석대표 악수도 인사도 없이 조인식 마쳐
‘당사국 제쳐놓은 결정서로 종막’ 정전협정 묘사한 기사 눈길
휴전회담 기간 취재경쟁 치열 남북 기자들 격한 기싸움도

 

 ‘좌절된 한국의 통일염원, 역사적 순간! 27일 상오 10시 7분’

(경향신문, 1953년 7월 28일 자 )
 '정전협정 서명! 총격은 오늘 오전 9시 종료. 일주일 안에 전쟁포로 교환’

(영국데일 리 미러,1953년 7월 27일 자)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일. 국가의 운명이 정해지는 순간, 종군기자들은 숨죽이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채웠다. 기자들이 증언하는 62년 전 그날로 거슬러 올라가 봤다.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왼쪽)과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오른쪽)이 판문점에서 정전협정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 제공=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정전협정 서명, 쌍방 대표 눈도 안 마주쳐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회담장 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50여 명의 내·외신 종군기자들은 4~5채의 회담막사 주변에서 회담발표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당시 한국중앙방송국(현 KBS) 방송기자였던 한영섭(88) 6·25종군기자동우회장은 A4용지 크기의 휴대용 녹음기를 어깨에 메고 속보를 전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타 매체 기자들도 수첩에 펜을 고정하고 회담장 주변의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정전협정 조인식 광경을 취재했던 조선일보 고(故) 최병우 기자는 이같이 보도했다.

 “학교 강당보다도 넓은 조인식장에서 할당된 한국인 기자석은 둘뿐이었다. 유엔 측 기자단만 해도 100명이 되고, 참전하지 않은 일본인 기자석도 10명이 넘는데, 휴전회담에 한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해리슨 수석대표가 휴전회담장으로 들어가는 도중 의장대의 경례를 받고 있다. 사진 제공=DMZ 박물관

 


 오전 9시 57분, 이제까지 본회의를 주관해 왔던 양측의 휴전회담 수석대표들이 회의장으로 들어왔다. 유엔군 측 수석대표 윌리엄 K. 해리슨(미 육군중장)과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북한군 대장)은 회의장 반대쪽에 각각 자리를 잡았다. 휴전회담 대표들이 앉은 책상 위에는 정전협정문을 비롯해 첨부문건인 ‘중립국송환위원회 직권범위’와 ‘정전협정에 대한 임시적 보충협정’이 놓여 있었다. 이 문서는 모두 18부로 영문 6부, 중문 6부, 그리고 국문 6부로 돼 있었다. 서명은 휴전회담 수석대표들이 각각 9부씩 서명한 뒤 서로 교환해 다시 9부씩 교환하는 방식이었다. 양측의 수석대표는 입장하면서 서로 악수도, 인사도 없이 자리에 앉자마자 무표정하게 사무적인 서명만 했다.

 10시 12분, 서명을 마친 양측 수석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시선을 마주했다. 단 한마디의 인사말도 나누지 않은 채 퇴장했다.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이 먼저 헬리콥터를 타고 판문점을 떠났다.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과 그 일행은 소련제 지프에 나눠 탄 후 판문점을 떠났다.

 정전협정 조인식이 끝난 후 3시간이 지난 오후 1시,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미 육군대장) 장군은 경기도 파주시 문산의 한 극장으로 갔다. 한국군 대표인 최덕신 육군소장과 미 8군사령관 테일러 장군, 극동해군사령관 클라크 제독, 극동공군사령관 웨이랜드 장군의 배석하에 클라크 장군은 유엔군 측 최고사령관의 자격으로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는 중공군사령관 펑더화이. 사진 제공=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극장은 장교와 병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57명의 종군기자, 20명의 사진기자, 5명의 라디오 및 텔레비전 아나운서 등 취재진들이 경쟁하듯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렸다. 이 장면을 취재한 최병우 기자는 1953년 7월 29일 자에 ‘기이한 전투의 정지, 당사국 제쳐 놓은 결정서로 종막/ 한국문제 해결에 일보 진전 클라크 장군 조인 후에 성명’이라는 기사를 썼다. 당시 이 기사는 새로운 스타일의 짧은 문장, 간결한 묘사, 그러하면서도 역사적인 의미를 묘사한 기사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의 UP(현UPI)와 AP통신을 비롯해 영국의 로이터 통신과 데일리 미러, 프랑스 AFP통신 등 주요 외신들도 이 역사적 사건을 보도하기 위해 뜨거운 취재 열기를 보였다.

 

 

▲2년여 휴전회담 기간 종군기자들의 취재생활

 6·25전쟁의 정전을 위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의 협상은 1951년 7월에 시작돼 2년 동안 지루하게 이어졌다.

기자들은 휴전회담 취재 시 인원의 제한을 받아 어려움도 많았다. 1951년 7월 10일 첫 휴전회담이 시작된 지 3일째인 12일, 북한 측이 갑자기 기자출입을 거부해 이틀 동안 회담이 열리지 못하다가 15일 재개하는 조건으로 기자단 20명으로 한정해 취재를 허용하기도 했다.

 1951년 7월 15일 조선일보에는 ‘발신은 1일 300어(語), 일인기자들에게 보도제한’이라는 기사에서 일본인 기자와 사진반원을 합쳐 18명이 휴전회담 취재를 위해 유엔 종군기자의 완장을 달고 서울에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당시 강화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피점령국 일본 신문기자들이 어깨에 종군기자 마크를 달고 회담장에 나타나 자유롭게 취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기자들이 송고할 수 있는 기사 분량은 하루에 300단어로 제한됐다.

1953년 7월 29일 자 국도신문에 실린 휴전협정 조인식 기사. 사진 제공=DMZ 박물관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던 최병우 기자는 1953년 4월 8일 1면에 부상포로 교환을 위한 연락회의가 열린다는 기사를 실었다. 특히 최 기자는 판문점을 출입하면서 외국 특파원들과 취재경쟁을 벌여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휴전회담 기간 남한과 북한 기자들은 취재장소에서 만나 기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한영섭 회장은 근접거리에서 남쪽 종군기자들의 얼굴 사진을 찍던 북한기자를 떠올렸다.

 “‘보도’ 완장을 찬 북한기자들이 모든 남한기자들의 사진을 찍어가더라고요. 한번은 ‘사진 찍지 말라’고 강력하게 얘기했는데 소용없었어요. 끈질기게 사진을 찍었어요. 남한기자들은 그들이 기자로 둔갑한 보위부 사람이라고 수군댔죠. 한번은 북한기자가 인삼주를 건네 사이좋게 얘기하다가도 공산당 체제에 관한 논쟁이 불거지면 격하게 반발하며 싸우기도 했습니다.”

 

1953년 7월 27일자 영국데일리미러1면에 실린 정전협정 기사. 사진 제공=DMZ 박물관


 1953년에도 한국 기자의 출입은 제한됐다. 같은 해 4월, 교착상태에 빠졌던 회담이 6개월 만에 다시 열렸을 때 회담 취재를 위해 몰려든 기자는 거의 100명에 달했다. 4월 6일 열린 예비회담 때는 69명의 기자, 사진기자, 뉴스 촬영팀, 라디오 녹음반, TV 관련자들을 수송하기 위해 지프 11대와 대형버스 2대, 트럭 2대가 동원됐다. 당시 기자의 수는 미국, 일본, 영국, 한국, 프랑스 순으로 많았다. 한국 기자는 4명이었지만, 일본 기자는 11명이었다. 외국 통신사에 소속된 일본인 사진기자도 6명이었다.

 고 이혜복 경향신문 기자는 생전 증언록에서 “판문점 정전회담 때 모든 전선에서 포성은 멎었지만 협정이 조인되기까지 미·소 간에 벌어진 신경전을 취재하느라 거의 밥을 굶다시피 했던 동료 종군기자들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