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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6·25 65주년 특집] 또 다른 6·25 10대 전투·작전 <5>F-51D 전투기 진해기지 출격작전과 송림제철소 폭격작전

빨간 마후라, 구국의 열정으로 기적을 쏘다

 

■ F-51D 전투기 진해기지 출격작전과 송림제철소 폭격작전

6·25전쟁 개전 초기에 단 한 대의 전투기도 보유하지 못했던 우리 공군은 L-4/5, T-6 등 연락기만으로 소련제 야크 전투기로 무장한 적을 저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군인정신과 조국에 대한 충성을 연료 삼아 하늘로 날아올랐으나 전투기의 빈자리는 너무나 컸다. 모든 면에서 적에게 열세였지만 필승의 신념으로 무장한 우리 공군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항공 구국을 향한 공군의 열정과 의지는 기적을 일궈냈다.

 

■  F-51D 전투기 진해기지 출격작전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10대 지원 받아 일주일 훈련

곧바로 낙동강방어선 사수 항공 지원 ‘혁혁한 전과’

 

공군진해기지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전투조종사들을 격려하고 있다. (1950.8.29)

 

진해기지에서 정비사들이 대한민국 공군 F-51D 전투기를 정비하고 있다.


 

  한국 공군은 북한군 전차를 격파하고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전투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미 극동군총사령부와 교섭 끝에 10대의 F-51 전투기를 지원받는다. 한국공군은 비행단장 이근석 대령을 인수팀장으로 10명의 조종사를 선발해 1950년 6월 26일 일본 규슈(九州)에 있는 이다즈케 기지로 보냈고, 이들은 짧은 적응훈련 후 7월 2일 오전 F-51 전투기를 조종해 대구기지로 돌아온다.

 지상군의 항공지원 요청을 받은 공군은 인수 다음 날인 7월 3일부터 16일까지 9일 동안 주로 대지공격 임무로 총 19회 편대 출격해 연료 집적소 4곳, 탱크 4대, 차량 14대, 탄약 집적소 8곳, 적병 사살 약 235명 등의 혁혁한 전과를 거뒀다.

 이후 진해기지(K-10)로 이동한 대한민국 공군의 F-51D 비행부대는 이곳을 모기지로 하고 김해기지(K-1)를 훈련기지로 해 8월 1일부터 F-51D 전투기 비행훈련을 시작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적의 공격이 치열해지자 진해기지에서 전투기 비행훈련을 받고 있던 우리 조종사들은 8월 14일부로 훈련을 중지하고 15일부터 아군에 대한 항공지원 작전을 시작했다.

 8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진해기지를 방문해 전투조종사들을 위로했다. F-51D 전투기를 바라보던 이 대통령은 ‘내가 이것을 얼마나 바라던 것인데’ 하며 손으로 어루만졌다고 한다.

 2주일간 비행훈련을 받은 6명의 조종사는 8월 15일부터 미 6146기지부대 조종사들과 함께 출격했다.

 우리 공군은 미 25사단에 대한 근접항공지원작전을 실시하는 한편 낙동강 방어선 후방의 적 이동병력과 보급품 집적소를 타격했다. 15일부터 17일까지 하동·광양·함양 등 주로 적 6·7사단의 후방을 공격해 차량과 야포 진지 등을 파괴했다. 또 18일부터 21일까지는 영동·김천·상주 등으로 출격해 차량 4대를 파괴했다.

 이후 22일부터 30일까지 적 해안방어진지와 보급품 지원 차량, 보급품 집적소 등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마산 지역 방어선이 무너지면 낙동강 방어선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우리 공군은 9월 2일 의성·함창·상주를 공격하고 4일에는 무주·대전, 5일에는 논산, 6일에는 공주 등을 공격했다.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16일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 지상군에 대해 유엔군과 국군의 총반격이 시작되면서 진해기지를 중심으로 낙동강 전선에 대한 항공지원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출격 임무를 완수한 후 기지로 돌아온 우리 조종사들이 전투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유엔 공군의 네이팜탄 공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북한 지역 공장 건물.

 


 

■ 송림제철소 폭격작전

10전비 출격 용광로·탄약 저장소·철도 파괴

한국 공군 최초로 독자적 산업시설 공중폭격

 

 1952년 3월에서 4월에 걸쳐 우리 공군이 수행한 북한 공업도시 송림시 폭격 임무는 6·25전쟁사에서 크게 빛나지는 않지만 성공적인 작전으로 꼽힌다. 

 송림시는 대동강 어귀에서 약 50㎞ 거슬러 올라가 황주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도시다. 이곳은 경의선 황주역에서 13㎞에 이르는 지선이 설치돼 있었고, 대동강 수로를 이용해 5000톤급 선박의 정박도 가능한 교통 요충지였다.

 또한 철광석과 석회석 등 광물의 매장량이 풍부했고 해상 교통수단인 대동강을 끼고 있어 1918년 일본이 제철소를 건설하기도 했다. 당시 송림제철소에는 150톤급 용광로 3기, 200톤급 용광로 2기를 갖춘 제강공장과 코르크·유안·벤졸 등의 공장이 있었으며 제강공장에서는 선철·철판·레일 등을 생산하고 있었다.

 유엔 공군은 북한의 전쟁 잠재력을 조기에 제거함으로써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초 흥남·원산·평양·나진 등 북한의 산업중심지를 B-29와 B-26 폭격기로 파괴했고, 이후 중소도시의 산업시설에 대한 폭격도 계속해 나갔다. 미 5공군은 이러한 산업시설 폭격작전의 하나로 대한민국 공군에 1952년 3월 28일부터 북한의 공업도시인 송림시를 폭격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이에 따라 강릉기지에 주둔한 10전투비행전대에서는 1952년 3월 28일 오전 옥만호·김금성 대위를 편대장으로 한 2개 편대 8대의 F-51D 전투기를 출격시켰다. 우리 공군 편대는 송림의 공장지대 상공에서 적의 군수시설인 조차장과 유류 및 탄약저장소를 폭격하고 귀환했다.

 오후에도 이기협·나창준 대위를 편대장으로 하는 8대의 전투기 편대가 동일 지역으로 출격해 송림제철소를 폭격했다. 이날 출격한 16대의 F-51D 전투기는 500파운드 폭탄 2발과 로켓탄 4발을 각각 장착하고 출격해 용광로 2개소, 건물 4동과 부근의 철도 1개소를 파괴했다.

 29일과 30일에도 잇따라 F-51D 전투기가 송림 지역으로 출격해 폭탄 및 로켓탄, 기총을 이용해 공장건물과 각종 저장소를 공격했다.

 4월에 들어서는 2~9일 사이에 나흘간 총 61소티 출격해 송림 지역의 공장지대와 제철소 지역을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광로, 부속 건물, 군수공장, 유류집적소와 송림시 공장지역으로 연결되는 주변의 철도 및 철교 등을 파괴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 작전은 대한민국 공군에서 최초로 감행한 적의 산업시설에 대한 공중폭격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