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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6·25 65주년 특집] 또 다른 6.25 10대 전투·작전 <2>낙동강 영산전투와 포항 형산강전투

처절한 전투, 최후 방어선 '낙동강'지키다

 

1950년 8월 초 국군과 유엔군은 빠르게 남진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낙동강을 끼고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다. 국군이 대구에서부터 포항까지 방어선의 북쪽 지역을 주로 방어했다면 미군은 방어선의 서쪽 지역을 주로 지켰다. 낙동강 방어선 일대에서 치른 미군의 전투 중 가장 처절한 양상으로 진행된 것이 바로 영산전투다.

 

▲ 낙동강 돌출부의 격전…미8군 해병대 투입해 방어선 구축
  북한군은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겠다는 목표로 8월 공세를 구상했다. 대구 서측방 현풍에서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 지점인 남지까지 37㎞의 방어 정면은 미24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창녕과 영산지역에서 낙동강이 서쪽으로 크게 돌출돼 흐르고 있어 ‘낙동강 돌출부 지역’이라고 불렸다. 북한군은 이 지역의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해 대구의 후방을 위협하고, 밀양으로 진출해 대구에서 부산에 이르는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다.
 미24사단은 8월 2일과 3일 낙동강을 도하해 34연대를 영산, 21연대를 창녕, 배속된 국군 17연대를 현풍 지역에 배치하고, 19연대를 창녕에 예비로 확보했다. 미24사단장은 합천 일대에 집결해 있던 북한군이 창녕지역으로 집중할 것으로 판단하고, 사단 예비인 19연대를 창녕에 위치시켜 북한군의 도하공격을 저지하려 했다.
 북한군 4사단은 8월 5일 미24사단장의 판단과는 달리 북한군 16연대를 영산 정면 오항나루터로 투입했고, 일부를 창녕 정면 부곡리로 투입했다. 북한군은 전방 방어선을 돌파하고, 클로버 고지를 점령했다. 이어 오봉리 능선까지 진출했다.

 

미군 전차와 보병


 상황이 악화되자 미8군사령관은 8군 예비로 있던 미2사단 9연대를 즉시 이곳에 투입했다. 미2사단 9연대는 8일 반격을 가했으나 실패했다. 9, 34, 19연대와 21연대 1대대를 힐 특수임무부대(TF Hill)로 편성, 8월 11일 아침 공격을 개시해 돌출부 내의 북한군을 구축하도록 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선수로 힐 특수임무부대의 공격 계획이 무산됐다.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오른쪽)과 미 제24사단장 처치 소장(왼쪽)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미1해병여단을 24사단에 배속하고, 8월 17일 공격을 개시해 낙동강 돌출부 동안(東岸)에 진출한 북한군을 완전히 몰아내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북한군은 미군의 공격이 개시되기 하루 전인 8월 16일 대규모 공격을 가해왔다. 미24사단장은 8월 17일, 전 부대에 공격 명령을 하달하고, 오봉리와 클로버 고지 일대에 동시 공격 준비사격을 했다. 이에 북한군은 전차 4대를 동원해 클로버 고지와 오봉리 사이 도로를 따라 반격해왔다. 미 해병대는 즉시 항공지원을 요청하고 M-26전차를 전방으로 추진했다. 주요고지를 점령한 미24사단과 해병대는 8월 18일까지 소탕전을 전개, 낙동강에서 합류함으로써 낙동강 돌출부의 북한군을 축출했다. 미8군은 북한군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해병대를 투입함으로써 영산지역에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포항 탈환과 북진의 발판이 된 ‘포항 형산강 전투’
 1950년 8월 북한군의 공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동부전선의 청송지역으로 진출했던 북한군 12사단이 방향을 바꿔 경주 방어의 요충인 기계를 점령, 11일에는 포항을 점령함으로써 국군3사단은 고립되고 경주마저 위태롭게 됐다.
 포항 형산강 남쪽은 영일군과 구룡반도로 이어지기 때문에 경주를 노리는 적의 작전이 한결 쉬워지는 이점이 있다. 만약 인근의 영일 비행장을 적이 차지한다면 아군의 공군 출격을 저지하는 이점 또한 크기 때문에 형산강 지역은 피아 쌍방간 전략요충지로 포항 공방전의 최대 격전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은 형산강 도하작전을 서둘렀다. 5사단과 12사단, 유격부대인 766부대를 필두로 하고 있었다. 육군본부와 미8군사령부는 포항만은 기어코 탈환해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절명의 위기였기 때문에 3개 독립부대를 투입해 북한군 12사단이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게 형산강을 막고자 했다.

 

보병을 지원하고 있는 미 포병


 1950년 9월 16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단행된 이틀째인 이날 최전선의 상황은 급전하기 시작했다. 적은 이미 낙동강 전선 도처에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북한군이 형산강의 유일한 다리인 형산교를 돌파하려고 여러 날 시도하다 화력이 급격히 떨어졌을 때 “형산강을 도하해 포항을 탈환하라!”는 국군3사단 공격명령이 형산강 일대를 방어하고 있던 22연대로 하달됐다.
 당시 3사단 22연대 1대대 1중대 분대장이었던 연제근 이등중사는 분대원들과 의견을 모은 후 소대장에게 분대의 사전 도하돌격을 요청해 중대장의 승인을 얻었다. 9월 17일 새벽 4시 아군의 공격준비 사격이 대안상의 북한군 진지를 강타하는 순간 탄띠와 멜빵 가득히 수류탄을 찬 연제근 이등중사와 12명의 특공대원은 형산강 도하 통로를 확보할 목적으로 어둠을 뚫고 가슴까지 차는 물살을 가르며 강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적진 가까이 전진하자 2정의 적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어깨에 총상을 입은 연제근 이등중사는 3발의 수류탄으로 적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한 뒤 적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이후 22연대는 형산강을 넘어섰다. 연제근 이등중사와 분대원 12명의 목숨을 건 형산강 도하 통로 개척은 아군의 성공적인 도하작전의 도화선이 됐고, 포항 탈환과 북진의 발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