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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6·25 65주년 특집] 또 다른 6·25 10대 전투·작전 <1>한강방어선전투와 김포지구전투

한강 두고 6일간 사투 ...국가 운명을 가르다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기록된다. 전사는 중요성을 기준으로 조명된다. 하지만 전쟁에서 하찮은 전투는 없다. 모든 전투는 그 가치를 지닌다. 6·25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전투의 누적이 승리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의미에도 불구하고 조명받지 못하고 기억에서 사라지는 전투가 태반이다. 이에 국방일보는 그 가치에 비해 조명받지 못했던 10대 전투를 선별해 소개한다.

 

 

 영등포 일대에서 정찰 중인 국군 장병의 모습 

 

#1 전황을 바꾼 6일간의 혈전…한강방어선전투 

한강방어선전투

6월29일, 육군 3개 사단의 방어작전

우리 군 사기 오리고 적의 남진 지연시켜

 

 “앞으로 3일 동안 이 한강선을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가름된다. 죽으려면 당당하게 여기서 죽자.” - 김홍일(소장) 시흥지구전투사령관 훈시 일부

 

 1950년 6월 25일 새벽 급습을 감행해 순식간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북쪽을 점령한 북한군은 자축 분위기에 휩싸였다. 북한군은 28일 초기 목표인 서울 점령을 자축하는 분위기 속에서 부대 정비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부터 한강 도하를 통해 유엔군 참전 이전에 남한을 석권하겠다는 것이 북한군의 복안이었다.

 북한의 계획을 간파한 우리 국군은 한강방어선을 ‘국가 존망을 결정지을 생명선’으로 판단, 김홍일 육군참모학교 교장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 한강선 방어 임무를 부여했다. 김 사령관이 이끄는 시흥사 예하 3개 혼성사단(수도·2·7사단)은 적의 남하를 막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훗날 ‘한강방어선전투’로 불리는 이 전투는 우리 군 3개 사단이 북한군 제1군단 예하 보병 3개 사단(3·4·6사단)과 전차 1개 여단의 공세를 6일 동안이나 막아낸 절체절명의 방어작전이다.
 북한군 주력 부대의 도하는 29일 오후 시작됐다. 하지만 우리 군은 흑석동·서빙고·오류동·마포 일대에서 파상적으로 벌어진 적의 도하를 막아내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특히 영등포 일대에 배치됐던 8연대와 18연대는 7월 3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친 적의 도하공격을 격퇴하며 여의도를 굳건히 사수했다.
 하지만 한강방어선전투는 3일 적이 수리를 마친 한강철교를 이용해 도하에 성공하면서 끝이 났다. 김 사령관은 후일을 기약하고 안양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6일간의 접전은 적의 남진을 지연시키며 우리 군이 기사회생의 실마리를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방어선을 조기 돌파하겠다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 북한군은 우리 군을 돕기 위해 참전한 미국 등 유엔군과 맞서야 했다. 또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떨어졌던 우리 군의 사기도 한강방어선전투의 성과를 계기로 회복됐다. 

 

 

 

 

출동중인 장갑차 

 

 

57mm 대전차포를 발사하고 있는 국군

 

 #2 비운의 부대 ‘김포사’와 김포지구전투

 

김포지구전투

적의 급습에 곧바로 투입된 김포사 부대

3일 버텨...한강방어전투 전에 큰 기여

  

 한강방어선전투의 전과는 비운의 부대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눈물겨운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포사는 전쟁 발발 직후인 26일 오전 전략적 요충지 김포에 위치하고 있던 남산학교(정보학교) 기간요원(장교 10명, 사병 30명)을 모체로 편성된 부대다. 사령관으로 임명된 계인주(대령) 남산학교장은 우리 군의 서쪽 퇴로를 차단하려는 북한군 6사단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김포사는 장갑차 1개 소대와 1사단 12연대 2대대 등 4개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꾸려졌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편성된 김포사는 제대로 된 지휘체계도 갖추지 못한 채 전장에 나서야만 했다.
 전투는 26일 북한군 6사단이 김포반도에 상륙을 시도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날 오후 6사단은 김포반도 서쪽을 통해 도하에 성공했고 다음날에는 김포반도에 안착한 주력 부대가 본격적인 전진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장영문(소령) 보병학교 후보생대대장이 전사하는 등 김포사는 큰 피해를 입었다.
 적의 파상공세에 밀리기 시작한 김포사는 김포읍에서 김포비행장, 다시 소사읍까지 밀려났다. 김홍일 사령관은 28일 우병옥 중령을 새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다시 김포비행장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저지에 사력을 다했던 김포사는 이미 전력의 절반이 떨어져나간 열악한 상황이었다. 김포사는 이런 악조건에서 29일 김포비행장 탈환에 나섰지만 수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결국 실패했다. 심지어 우 사령관까지 작전 실패에 책임을 지고 자결하면서 김포사는 사실상 와해됐다.
 김포사는 빈약한 무기와 탄약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에서 손꼽히는 전투부대인 6사단에 맞서 3일 이상 진군을 늦추며 한강방어선 서쪽을 노리던 적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김포사의 마지막 전투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이들의 분전이 없었다면 한강방어선도 더 빨리 무너졌을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것이 잊혀진 김포사와 김포반도전투의 의의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