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쟁사

정전협정 앞두고 치른 6·25전쟁 4대 고지 전투

돌격하라, 저 고지에 태극기 휘날릴 때까지

 

1951년 7월 10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2년여간 정전을 위한 회담은 지루하게 계속됐다. 무려 748일 동안 159회의 본회담과 765회의 각종 회담이 이어졌다. 이 기간 전투는 전선이 교착된 상태에서 치열하게 펼쳐졌다. 대부분이 조금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수색정찰전·진지전·고지쟁탈전 형태로 치러진 것이다. 특히 유엔군과 공산군은 정전회담을 유리한 위치에서 이끌어 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선에서 서로를 압도하려 했다. 당연히 전투는 치열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었고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정전을 앞두고 치러진 전투 중 대표적인 4개 전투를 소개해 본다.(사진=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351고지전투(1953. 6. 2~7. 18)

3차에 걸친 공방전…반격의 중요성 일깨워

 

 

정전협정을 앞두고 벌어진 전선의 고지전에서 진지 탈환을 위해 역습에 나서고 있는 국군.

 

 

강원 고성군 현내면 명호리 통일전망대 내에 세워진 351고지전투 전적비.

 

동해안 최북단 군사분계선 인근은 산과 바다가 만나는 수려한 경치로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60년 전 그곳은 격렬한 고지쟁탈전의 현장이었다.  

 

정전 직전 수많은 국군 장병들이 목숨을 바치면서 351고지 탈환 전투를 벌였다. 351고지는 북쪽의 저지대를 감제할 수 있고, 월비산 점령의 발판 역할을 할 수 있어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351고지전투는 1953년 6월 2일부터 7월 18일까지 국군15사단이 이곳을 장악하려는 북한군 3·7사단을 맞아 전개한 방어전투다.

 

6월 2~6일까지 벌어졌던 1차전에서 강력한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351고지로 진격하는 북한군 7사단을 맞아 육박전까지 벌이며 고군분투했으나 진지를 내주고 말았다.

 

이에 재탈환을 위한 공격을 감행했으나 적의 포격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철수하게 된다.

 

 이후 6월 4~5일 야간공격을 비롯한 역습을 수차례 감행했으나 역시 무위로 끝나고 만다. 사단장은 사단예비 전력까지 모두 투입했음에도 고지 탈환에 실패하자 일단 공격을 중단한다.

 

15일 벌어진 2차전은 유엔군 공군의 B-29 폭격기가 월비산을 비롯한 고성 일대를 폭격해 초토화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어 포병과 전차가 고지에 근접한 적 진지를 포격했다. 공격을 시작한 아군은 적의 기관총과 직사포 사격에 주춤한다. 워낙 완강한 저항에 탄약과 수류탄마저 떨어지고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에 사단장은 351고지에 집착하기보다는 현 방어선을 지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결정했고 유엔군사령부는 351고지 탈환을 위한 공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3차전은 7월 17~18일 벌어졌는데 포격지원을 받으며 진지 회복을 위해 혈전을 치렀으나 적의 맹렬한 저항으로 실패하고 만다.

 

351고지전투에서 국군은 첫날 역습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적이 방어력을 강화하기 전에 고지를 탈환하는 데 실패했다.

 

한 달여에 걸쳐 치열하게 싸웠지만 경험 부족과 지형적 불리함, 정전협정 체결에 따른 제약으로 351과 339고지를 북한군에 넘겨준 채 전투를 종료하게 된다. 이 전투는 반격의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고지를 재탈환하지 못한 아쉬움은 남았지만 많은 손실만 가져 오는 반복적인 대대급 역습을 중단키로 한 판단 역시 현명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M-1고지 전투(1953. 6.10~6. 23)

국군 18회 걸쳐 반격…북의 휴전선 확장 막아

 

M-1고지전투는 휴전을 1개월 앞두고 북한군과 중공군이 마지막 공세를 감행할 무렵 중동부 전선의 선우고지(938고지)와 크리스마스고지를 방어하고 있던 국군20사단이 크리스마스고지 우측의 전초진지인 M-1고지를 공격해온 중공군 33사단을 물리친 전투다.

 

6월 10일부터 14일간 중공군은 이 고지를 22회 공격해 16회 점령했고, 국군은 18회에 걸쳐 반격을 실시해 끝까지 고지를 사수했다. 이로써 국군2군단 지역에서 시작된 전투가 동쪽 지역의 미 10군단 지역으로 확대되는 사태를 차단할 수 있었다.


10일 국군20사단은 공격 준비 사격에 이어 중공군 33사단의 공격을 받게 된다.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던 어은산 남쪽 1090고지 동남쪽 M-1고지를 지키고 있던 61연대 6중대는 중공군 약 1개 대대의 공격으로 고지 정상의 주진지를 포기하고 서쪽 1소대의 진지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2대대는 수색중대를 주저항선에 추진시켜 5중대의 진지를 인수받게 하고 5중대는 M-1고지를 탈환하도록 했다.

 

12일 새벽 3시 아군의 역습이 시작됐으나 비가 내려 기동이 어려웠다. 공격부대는 각각 20발의 수류탄과 소총을 휴대했다. 하지만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중공군은 만만치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용택 일병이 수류탄을 집중 투척해 적군의 방어진지를 뚫고 고지를 다시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3시경 중공군의 포격에 이은 1개 중대 규모의 역습으로 고지를 다시 빼앗기고 만다.

 

13일부터 20일까지 국군20사단 60·62연대는 1090고지와 938고지 일대를 놓고 적과 뺏고 뺏기는 공방전을 반복한다. 이 고지를 공산군에게 빼앗기면 북의 휴전선이 확장되기 때문에 국군 20사단장과 미군 10군단장은 M-1고지 사수를 다짐한다.

 

21일, 중공군의 제파식(단순히 병사를 나눠 계속 공격하는 방식) 공격에 고지를 상실했다가 다시 탈환하는 과정이 반복되며 10시간 동안 고지의 주인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22일, 60연대가 61연대의 주진지와 M-1고지 인수를 완료하고 원활한 항공지원과 포병의 화력지원으로 중공군의 공격도 중단됐다. 이로써 6월 10일 이후 지속됐던 반복적인 쟁탈전이 종료됐다.

 

국군20사단은 1953년 2월 9일에 창설된 사단으로 병력 대부분은 신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관의 솔선수범과 진두지휘를 바탕으로 중공군 33사단의 2개 연대 이상 병력을 상실케 했으며 국군5사단이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탈환하라, 한 치 땅이라도 더 차지해야 한다

 

고지를 점령한 후 진지를 새로 구축하고 있는국군 장병들. 사진=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국군 장병들이 고지에 구축한 진지에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다. 사진=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베티고지전투(1953. 7.15~16)

소대병력으로 이틀간 중공군 3개 대대 격파

 

베티고지전투는 중공군의 최후 공세인 ‘7·13공세’ 당시 중공군 1군단 예하 1사단이 임진강 서안 고양대 부근의 국군1사단 11연대의 전초 베티고지를 공격하자 김만술 소위를 비롯한 소대 병력이 이틀간 백병전을 펼친 끝에 대대 규모의 중공군을 격파한 방어전투다.

 

당시 중공군은 휴전 성립을 목전에 두고 주요 지형을 확보하기 위해 결사적인 국지공격을 감행해 오고 있었다.

 

서부전선의 요충지였던 베티고지는 그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으로 인해 국군과 중공군 간에 이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치열했다.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쪽에 위치한 이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휴전이 성립될 경우 주저항선에서 남쪽으로 2㎞ 이상이 비무장지대로 결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국군은 그만큼 임진강 남쪽으로 물러나야 했다.

 

이는 군사적·지리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국군은 5·6·7중대를 FEBA에 배치하고 6중대 2소대(소대장 김만술 소위)를 전초진지인 ‘베티고지’에 배치해 방어를 실시했다.

 

15일 김만술 소위는 13∼14일간의 적 공격으로 전투력을 상실한 7중대 1소대와 교대해 베티고지 방어 임무를 인수했다.

 

그날 저녁 약 1개 소대 규모의 적이 각종 포의 지원 아래 공격해 오자 2소대는 고지 사수를 위해 백병전을 전개했다. 김 소위는 34명 소대원의 선봉에 서서 부하들의 용기를 북돋웠다.

특무상사로 실전 경험이 많았던 김 소위는 “빗발치는 포탄 속에서도 침착하고 민첩하게만 행동하면 죽지 않는다”고 자신감을 심어줬다.  

 

2소대는 18시간 동안 무려 19회에 걸쳐 도합 3개 대대 병력의 적과 싸워 고지를 끝까지 사수했다. 베티고지전투에서 중공군 피해는 전사 314명, 부상 450명, 포로 3명이었으며, 아군 피해는 전사 24명이었다. 김만술 소대장을 비롯한 12명은 생환했다.

 

김만술 소위는 이 전공으로 후일 한국과 미국의 최고무공훈장 금성태극훈장 및 십자훈장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2소대가 목숨을 바쳐 사수했던 베티고지는 정전이 되면서 휴전선 북쪽에 포함됐다. 하지만 김만술 소위를 비롯한 소대원들의 끈질긴 결사 항전으로 중공군 3개 대대 병력에 큰 손실을 가한 그들의 투혼은 지금까지도 신화로 전해지고 있다.

 

금성전투(7.13~19)와 맞물린 시기에 치러진, 6·25전쟁의 대미를 장식하는 격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425고지전투(1953. 7. 20~27)

6·25전쟁의 마지막 승전…화천발전소를 지켜

 

 

돌격 앞으로. 함성과 함께 적진을 돌격하고 있는국군 장병.사진=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정전 협정을 일주일 앞둔 1953년 7월 20일부터 27일까지 8일간 국군7사단과 중공군 135사단이 화천 425고지에서 벌인 전투다. 화천발전소를 지키기 위해 치러진 이 전투는 결국 6·25전쟁의 마지막 승전으로 기록됐고 이로 인해 휴전선이 38선으로부터 35㎞ 북상했다.

 

425고지전투는 국군7사단이 화천으로 이동한 후 유일하게 수행한 마지막 전투다. 화천 북방 철책선 약 1.2㎞ 지점의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425고지는 적에게 빼앗기면 아군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요충지로서 중공군은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총공세를 펼쳤다.

 

정전협정을 앞두고 김일성은 화천발전소는 절대 넘겨줄 수 없다며 화천을 탈환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도 남한 전체 전력의 30%를 차지하는 화천발전소의 중요성을 인식, 절대 사수를 명령하고 7월 19일 2군단 사령부를 직접 방문해 독려했다.

 

중공군 135사단은 병력을 증강해 7월 20일부터 425고지를 계속 공격했다. 인해전술을 내세운 중공군의 공격에 아군은 백병전을 불사하며 싸웠고, 고지와 주저항선을 지켰다.

 

특히 이 전투에서 칠성부대 8연대 1중대장 김한준 대위는 60㎜ 박격포를 이용해 중공군 950여 명을 사살하고 화천발전소를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아군도 160명이 목숨을 잃었다.

 

1개 중대 병력인 196명의 중대원으로 중공군 1개 대대를 섬멸하는 전공을 세운 김한준 대위는 휴전 이후 이 대통령으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전투는 승리했지만 425고지는 정전협정 결과 남북으로 갈리고 말았다. 군사분계선이 고지의 중앙을 가르며 그날의 승리가 반쪽이 되고 만 것이다.

현재 425고지는 강원도 화천군 비무장지대에 위치하며 칠성전망대에서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지금은 치열했던 당시의 전투 흔적은 사라지고 짙푸른 숲에 고라니·멧돼지 등 동물들이 한가로이 뛰놀고 있다.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에 425고지 전적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