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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6ㆍ25전쟁 11대 전투 : <1>낙동강지구 전투

한미연합군, 최후의 보루 낙동강 방어선 지켰다
호국보훈의 달 기획 6ㆍ25전쟁 11대 전투 <1> 낙동강지구 전투 

 

 

 

8월 1일~9월 14일 북한군과 일진일퇴 거듭하며 공방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와 더불어 총반격 성공

 

6·25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이자 적의 남침을 저지하고 반격의 기틀을 마련한 낙동강지구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한반도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북한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치른 공방전이다.

 

한미연합군은 7월 말까지 ‘공간을 내주는 대신 미국 본토의 증원군이 한반도에 전개할 시간을 얻는 데 필요한 지연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제공 및 제해권 장악에도 불구하고 소련제 T-34전차와 자주포 등 현대장비와 무기로 무장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미연합군으로서는 북한군의 남진을 막고 유엔군의 반격의 발판이 될 부산을 중심으로 한 교두보 확보가 절대적이었다. 부산 교두보는 유엔군의 생명선과 같은 존재였다. 유엔군은 부산항을 통해 병력·무기·장비·군수물자를 공급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미군 증원부대의 관문이자 전략적 거점인 부산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낙동강을 따라 연결된 지역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결정했다. 이에 한미연합군은 1950년 8월 1일부터 4일까지 천연의 장애물인 낙동강을 따라 연결된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게 됐다. 낙동강 방어선은 최초 낙동강을 연해 형성된 방어선(X선)과 후에 다부동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방어선(Y선)으로 구분된다. 최초 형성된 낙동강 방어선은 동서 길이 90㎞, 남북 길이 150㎞로 총 240㎞에 달하는 방어선이다. 그 가운데 국군이 128㎞를 담당하였고, 미군이 112㎞를 담당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중동부 및 동부의 산악지역을 국군 2개 군단 예하 5개 사단(1·3·6·8·수도사단)이 담당했고 중부 및 서부 방면의 비교적 넓은 평야지대와 교통이 발달한 지역은 미8군의 직접 통제를 받는 미군 4개 사단(1기병·2·24·25사단) 및 미1해병여단이 맡아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을 치렀다. 낙동강 방어작전 시 미8군은 군단이 편성되지 않은 채 직접 예하 사단을 통제하며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군사령부의 지휘부담이 매우 컸다.

 

반면 북한군은 개전 이후 공격 기세에 힘입어 1950년 7월 말에는 낙동강 방어선 외곽까지 진출하였다. 북한군은 8월 초에 한미연합군이 낙동강 선에서 방어진지를 형성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신속한 추격전으로 낙동강을 도하한 뒤 대구와 부산을 점령함으로써 그들의 작전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북한군은 ‘한반도 공산화’라는 그들의 전쟁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총공세를 단행했다. 8월 공세 때 북한군은 13개 보병사단 가운데 11개 사단을 투입해 전 전선에 걸쳐 총공세를 펼쳤다. 이때 북한군은 대구 정면과 아군의 배치가 취약한 마산 정면에 주공을 지향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이곳에서 부분적인 돌파에는 성공했지만 돌파구 확장에 실패했다. 여기에는 한미연합지상군의 조직적인 방어와 성공적인 공·지 합동작전 수행 결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한군은 8월 공세 실패 후 9월 공세 때는 13개 사단 모두를 5개 공격집단으로 편성하여 대구·영천·경주·창녕·마산 정면에서 동시다발적인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북한군은 9월 공세도 실패했고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낙동강 전선에서의 총반격작전에 밀려 38선 이북으로 퇴각했다.

 

낙동강전선 방어작전의 성공은 정부의 총력전 체제 구축과 전쟁지도, 한미군 수뇌부의 역량 있는 작전지도, 이를 믿고 따른 국민과 장병들이 하나로 굳게 뭉친 결과의 산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