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레이브 하트”의 주인공 William Wallace의 꿈, 자유!!
왜 우리는 군대라는 것이 필요할까?
왜 우리에게 국방의 의무가 중요한 걸까?
바로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라는데...
스코틀랜드의 영웅 William Wallace가 바라던 세상과 꿈을 통해
그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자!!
세상엔 아무리 강한 것도 쓰러트리지 못하는 것이 있다.
강한 군대와 권력에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William Wallace.
그는 그 사실을 증명하였고, 잉글랜드는 조국에 대한 열망과 용감한 자의
마음을 결코 빼앗지는 못하였다.
비록 잉글랜드인 들에게 죽임을 당했으나 스코틀랜드인들의 가슴 속 깊이
살아남았고, 18세기 초까지 잉글랜드에 대한 항전으로 이어지게 하였던 것
이다. 현재 스코틀랜드는 1707년 이후로 잉글랜드와 합병을 하였지만,
아직도 스코틀랜드는 자치권을 행사하고자 하며, 전통을 지키고자 한다.
‘브레이브 하트’라는 영화를 통해서 William Wallace가 외친 자유를 생각해
보게 되면서 또한, 스코틀랜드의 역사적 사실을 비추어 볼 때에 과거 우리
나라가 겪은 역사적 아픔이 살며시 떠오를 수 밖에 없다.
지리상으로 스코틀랜드는 영국 브리튼 섬의 북쪽지방에 위치하고
국토의 대부분이 고산지대로 이루어져있다.
전통의상이나 악기 등을 비롯해 잉글랜드(앵글로족)와 달리 그들은 켈트족
으로 구성되어있다.
인구 면에서도 잉글랜드보다 10분의 1임에 따라 지속적으로 잉글랜드와
앙숙관계였다. ‘브레이브 하트’는 지금의 영국과는 많이 다른 오래 전의 역
사적 사실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더구나 멜 깁슨 감독은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으로 연기까지 하고 있다.
브레이브 하트는 1996년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수상작이며,
‘브레이브 하트’는 스코틀랜드의 영웅 William Wallace를 주인공으로
잉글랜드를 상대로 한 스코틀랜드의 독립투쟁을 소재로 삼은 영화로
1995년 개봉당시 영국내부에서 상영금지가 거론되는 등 영화 속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의 역사적 관계 표현으로 많은 논쟁을 일으킨 바 있다.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자면 스코틀랜드는 13세기 당시 잉글랜드의 힘에
굴복하여 핍박을 받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도 왕이 있었지만, 허울뿐이었으며 사실상 잉글랜드 왕가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대였다.
이에 대하여 스코틀랜드인의 자주성을 확고히 하고자 민중 봉기를 일으킨
사람이 있었으니 William Wallace였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으나 신랑과 첫날밤을 보내기 전에 먼저
잉글랜드인 영주에게 처녀성을 바쳐야 한다는 악습으로 인해 결국 그녀가
죽게 되자 그는 복수심에 불타게 된다.
바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사투는 사랑하는 여인과 아버지, 형의 죽음
등과 같은 민중의 핍박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강한 신념으로 뭉친 민중의 힘은 잉글랜드의 우월한 군사력에는
열세였지만 게릴라 전술로 작은 승리를 연거푸 얻어내갔다.
점차적으로 큰 군대로 변모해 나가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잉글랜드 왕가는 휴전을 제의하기에 이르기까지 한다.
공주를 특사로 보내지만 그녀는 William Wallace의 용맹함에 반해 어느 사
이에 사랑하는 감정을 키우게 되고, 그의 아이까지 임신하게 된다.
하지만 William Wallace의 군대는 몇 차례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잉글랜드의 대대적인 공격과 스코틀랜드 왕가의 배신으로 잉글랜드 왕가
와 뒷거래를 하여 무참하게 참패하게 된다.
간신히 목숨만 건진 William Wallace는 뿔뿔이 흩어진 군대를 재정비하지
만, 결국 잉글랜드의 계략에 빠져 포로로 붙잡히게 되고 안따깝게도 죽음
을 맞이한다.
그러나 수차례 걸친 전투에 승리하지만 끝내 잡히게 된 William Wallace은
절대 굴복은 하지 않았다. 물론 한 명의 인간으로써 살고자 하는 갈망에 굴
복을 하면 살려주겠다는 조건에 갈등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포된
William Wallace은 모진 고문을 당하는 순간에도 결코 굴복을 하지 않았다.
만인의 앞에서 줄에 매어 온몸이 난자당하고 내장 한 부분, 한 부분을 잘라
져 나갔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 속에서도 굴복을 하라는 고문관의 말에는
William Wallace는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윽고 외친 최후의
한마디,
"자유(freedom)!"
그의 마지막 절규는 너무나 전율적이고 인상적일 수 밖에 없었다.
희생 없는 승리는 없다는 말과 같이, 그는 결국 죽음을 의연하게 선택했고
자신의 의지를 비롯한 조국과 민족을 결코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죽지는 않았고 이 시대까지 많은 스코틀랜드인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William Wallace이 외친 자유(freedom)라는 개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
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유를 위해서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당해왔고, 많은 민족과 국가가 흥망을 거듭해온 것이다.
또한 영미권의 역사 속에서 프랑스대혁명, 영국의 권리장전, 미국의 독립
기념선언문들이 갖고 있는 공통의 기본 전제조권은 자유이며, 그들이 외치
는 자유주의는 억압받는 인간과 소외받는 계층에 대한 갈망이자 지향점인
것이다. 즉, William Wallace은 이러한 자유를 열망하고 끝까지 항전한 인물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도 스코틀랜드 독립전쟁과 같은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는 시기가
있었다. 하얼빈에서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굳은 의지로써 죽음을 맞이한 안중근 의사와 William Wallace는 공통점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한 민족의 자유와 미래를 위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이와 같은 두 인물의 사건으로 인하여 후대에 들어 민족적 저항이 더욱 심
화되었고, 끝내 자유를 쟁취하였다. 영웅은 그렇게 떠나가지만 그들은 결
코 죽지 않았다. 위대한 영웅은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조국의 자유
와 평화를 외치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고, William Wallace의 죽음에 스코
틀랜드 사람들은 William Wallace의 의로운 정신을 마음속에 새기며, 베노
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퇴시키고 소중한 자유를 얻게 된다.
그들의 행동은 다른 이들에게 새로운 투지와 용맹함을 부여하였고, 그 결
과 로서 자유를 얻게 되었다. 더불어, 그들의 의지와 자유라는 열망은 후세
에 이어지고, 현재와 같은 자유민주주의로 성장한 것이다. 즉, 이와 같이
우리가 이 시대에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
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자유국가
실현을 위해서는 국방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고. 능동적인 준비자세가 필
요하다.
글 : 박종근 기자 (국방홍보원 블로그 “어울림”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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